[설교] 한 여름의 크리스마스 - 막2
마가복음 2:13-14
2:13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2: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2:15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2:1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2:17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한 여름의 크리스마스, 한 여름의 크리스마스’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증거 하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인사 하겠습니다. “당신 때문에 행복합니다. 잘 되고 있습니다. 기도하면 됩니다.”
웬 한 여름의 크리스마스? 하시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오늘 제목은 남반구인 호주의 크리스마스는 한 여름에 있음을 의미하기도 하며, 오늘 증거 되는 설교의 의미를 역설적으로 표현해보고자 했습니다.
2012년 우리는 풍요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절대적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므로 상대적 빈곤함 때문에 괴로워하는 시대가 오늘의 한국 사회입니다.
상대적 빈곤함은 관계의 결핍을 말합니다. 절대적 빈곤은 아프리카의 나라들에게서 볼 수 있는 빈곤처럼 절대적으로 채워야하는 요소를 채우지 못함으로 일어나는 빈곤의 문제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상대적 빈곤은 절대적 빈곤함이 원인이 아닌 지존파나 막가파처럼 상대적 박탈감 – ‘나는 100원뿐인데 쟤는 1,000원이나 가지고 있네.’라는 비교 의식 - 에서 오는 정신적 빈곤함을 의미합니다. 상대적 빈곤함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보면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던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살아가며 자신의 생각 속에 함몰되어버린 모습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무엘상 18장 7절 이하를 보면
18:7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18:8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하고
18:9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이었습니다.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사울은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이었습니다. 사울 임금 당시 이스라엘 땅에서 가장 풍요로운 사람은 바로 사울 왕 자신이 아니었을까합니다. 그러나 사울은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부족함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여인들의 노랫소리에 마음을 빼앗겨 괴로워하는 불쌍한 존재가 되어있었습니다. 왜 자신이 가진 풍요로움을 잊고 여인들의 노랫소리에도 괴로워하는 존재가 되었을까요?
사울은 관계가 깨진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백성들과의 관계가 깨져버린 가난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절대적 빈곤과 상대적 빈곤 가운데 인간이 가장 참기 힘든 것이 무엇일까요? 육적인 절대적 빈곤은 버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적 빈곤인 정신적 빈곤은 이겨내기 어렵습니다. 이유는 인간은 영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관계가 깨져 빈곤한 삶의 아픔 가운데 있었던 사람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9장에 세리 마태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바로 가버나움의 세리 레위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세리는 여리고 세리장 삭개오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지배국인 로마의 앞잡이라는 비난과 멸시 속에서 민족의 죄인으로 살아가야하는 아픔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레위는 동족들로부터 비난받으며 관계의 단절 속에서 상대적 빈곤감으로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레위에게는 그 어떤 물질로도 채울 수 없는 마음이 공허한 그 하루하루가 너무너무 괴로웠습니다. 하루를 괴로워하며 살아가고 있던 세리 레위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2: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레위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자신의 상대적 가난함에서 벗어나 예수님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를 때, 예수님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울 때, 우리는 마음의 가난함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부요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레위는 세관이라는 마음의 착고를 끊고 부르심에 순종하여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의 길을 따랐습니다. 오늘 레위와 같이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고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기는 하지만 예수님을 따르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다는 것은 믿음의 자리에 들어선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자신이 예수님과 동행하는 친구가 되지 못함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알고만 살아가는 안타까운 종교생활을 할 뿐입니다.
레위와 같이 우리의 친구 되시려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일어나 주님을 따르는 은혜가 임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따를 때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공격받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2:1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공격합니다. 어찌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식사를 함께 한다는 것은 한 공동체에 들어간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말에도 가족을 식구라고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처럼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사단으로부터 공격받는 자리에 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영광의 길이기도 하지만 힘들고 어려운 길이기도 한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서기관은 율법에 능통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믿음의 제자들에게 세상의 잣대와 논리로 공격합니다. 율법주의로 공격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며 네 모양이 어째 그 꼴이냐?’ 그럴 때 우리는 더욱 예수님께 집중해야합니다. 서기관들과의 관계 – 논쟁이나 변론에 집중하는 것이 아닌 예수님의 말씀에 집중해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서기관의 비아냥거림을 무시하십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논쟁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길을 가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면 예수님처럼 예수님의 길을 따라야 승리를 얻습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제자들에게 선포하십니다.
17절을 보십시오.
2:17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예수님의 목적은 죄인과 함께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결핍의 영혼, 상처와 아픔의 인생과 친구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고통 가운데 있는 영혼들과 친구 되어 위로하고 천국의 기쁨을 얻고자하심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5:7을 보십시오.
15: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예수님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의 기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일어서는 자, 예수님의 제자로서 따르는 자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의 기쁨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 생활의 첫째 목적입니다.
레위는 자신의 집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기꺼이 나누었습니다. 아무리 비천한 죄인의 집일지라도 예수님이 함께하시는 곳은 그 어디나 거룩한 성전인 것입니다. 비록 연약할지라도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위해 내어드리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모레는 하나님의 기쁨을 전해 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강림하신 성탄절입니다. 예수님은 약한 자, 아픈 자, 매인 자,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을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따르시겠습니까?
흔한 오빠라는 동영상이 있습니다. 잠깐 이 동영상을 같이 보시겠습니다.
어떻게 보셨습니까? 오빠가 참 멋지지요. 동생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오빠의 모습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되어야하지 않겠습니까? 나보다 연약한 자를 위하여 기도하고, 물질을 내어주고, 땀을 흘려 섬기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을 기다리는 제자들의 모습이 되어야하지 않을까요?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고, 예수님의 눈길이 미친 곳을 바라보지 않으며 자신만 위하여 살아가는 모습은 마치 어린아이가 일 년 내내 산타할아버지와 아무 관계없이 살다가 선물만을 바라며 기다리는 모습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주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름을 통하여 회복의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과 함께함을 통하여 다른 이를 섬길 수 있는 능력의 종으로 거듭나는 2012년 성탄절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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