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참여 - 교회의 원심력로서의 사회참여
예수님께서 생각하시는 교회란 과연 어떤 것일까? 이는 모든 기독교인에게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안에 있는 우리가 생각하는 교회상과 밖에 있는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교회상도 중요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생각하는 교회상이다. 그 분이 곧 교회의 설립자요 머리요 심판자이시기 때문이다. 이런 예수님께서 생각하시는 교회의 사회 참여는 어떤 모습일까? 지금부터 예수님께서 생각하시는 교회의 사회참여에 대해 알아 보도록 하자.
예수님께서 생각하시는 교회는 왜 사회참여를 해야 하는 것일까? 하는 물음에 대해서 복음주의적인 - 진보주의의 반대되는 개념으로 - 대부분의 교회는 예수님은 사랑이시고, 교회는 예수님을 따르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차원에서 사회참여를 해야 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의 사회참여가 교회의 생명력을 유지시키는 한 축으로서의 원심력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물음에 답하기 전에 교회는 교회의 사회참여의 이유가 무엇인가를 규정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교회의 사회참여라 하면 걸인 구제나 노숙자 식사 제공 등의 봉사 활동과 낙선 운동 등의 정치활동을 흔히 떠올리곤 한다. 현재, 여러 복음주의적인 교회들은 교회의 사회참여의 범주로 교회의 사회봉사를 생각하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진보적인 교회들은 교회의 사회참여의 범주로 교회의 정치활동을 생각하고 있다. 교회의 사회참여와 교회의 사회봉사 또는 정치활동은 같은 것인가? 하는 물음에 교회들은 ‘아니다’라고 답한다. 생각과는 다른 대답을 하는 교회들은 사회봉사도, 정치참여도 아닌 교회의 사회참여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마땅한 답을 찾기 어려워한다. 문제는 교회가 교회의 사회참여의 정의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데 있다. 교회가 사회참여의 명확한 정의를 내리지 못하면서 어찌 사회참여의 범주를 바로 세울 수 있겠는가? 잘못 정의된 범주로 교회가 사회참여를 행한다면 교회의 사회참여를 사회봉사의 범주 또는 정치 활동뿐이라 생각하여 소극적이며, 좁고, 편협한 모습 등의 기형적인 교회의 사회참여가 될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교회의 사회참여에 관한 정확한 정의를 내릴 필요가 있다. 교회의 사회참여에 관한 담론을 명확히 결론내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사회봉사나 정치활동은 교회 - 모임(Meeting)으로서 - 의 가식된 - 예수님의 모습을 흉내내기에 급급한 - 모습으로 사회에 비췰 수도 있으며, 이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세상에 올바로 전하지 못하는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올바로 전하는 교회의 사회참여란 무엇일까? 예수님께서 생각하시는 교회의 사회참여는 어떤 모습일까? 이를 이야기하려면 먼저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이해 하여야 한다.
다음은 Louis Berkhof의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 중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일부와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있었던 로잔언약(Lausanne Covenant)의 전체 15개 항목 중 제 5항의 일부분인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에 관한 부분이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의 주요 개념은 하나님의 통치 개념이다. 이 통치는 성령의 거듭나게 하는 강력한 영향력에 의하여 죄인들의 마음속에서 확립되고 인식된다. 이 통치가 확립될 때, 죄인들은 측량할 수 없는 구원의 복을 확신하게 된다. 이 통치는 원리적으로는 땅 위에서 실현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시적이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다시 오실 때 비로소 그 절정에 달한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그의 나라 - 하나님의 나라 – 속으로 중생하여 들어간다. 그리고 그들은 그 나라의 의를 의롭지 않은 세상 – an unrighteous world – 속에서 단지 전시 – exhibit –할 뿐 아니라 전파 – spread –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가 선포하는 구원은 우리의 개인적, 사회적 책임의 총체성 속에서 우리를 변화 시켜야 – transforming – 할 것 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복음주의 신학자들의 견해가 구체적인 해석에서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하나님 나라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주재권(主宰權)이 실현되는 영역이라고 정의한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세계와 미래를 포함한 모든 시간 속에 구체적으로 실현 되는 것이다.
로잔언약에서 특히 강조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역사적 성격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이 땅에 임하였고(마 12:28 -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눅 17:20~21 -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그 완전함은 미래에 올 것이라 가르치셨다.(마 13:43 -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눅 12:31 -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역사(役事)에 동참하는 일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일하는 것이 되게 해 주었다. 하나님 나라의 역사성, 하나님의 주재권, 복음 전파의 총체성에 관한 복음주의 교회의 새로운 이해가 온건한 형태로 잘 반영 된 로잔언약의 제 5항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은 사회참여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잘 말하고 있다.
로잔언약을 기초한 존 스토트(John R. W. Stott) 목사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과 하나님 나라를 동일시 했다. 따라서 구원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사는 것, 즉 기독교인의 ‘모든 부분’과 ‘책임 전체’를 변화 시키는 것이다. 사회 참여에 대한 로잔언약의 표명 속에는 이처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합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온갖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 창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사랑해 주셔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예정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찬미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아들 안에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따라 그의 피로 구속 곧 죄 용서를 받게 되었습니다.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지혜와 총명을 넘치게 주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세우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하나님의 신비한 뜻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통일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상속자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자기의 원하시는 뜻대로 행하시는 분의 계획에 따라 미리 정해진 일입니다.
모든 교회에 요구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란 하나님께서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하셔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게 하는 구원 – 중생 - 을 이루기 위함이고, 구원의 내용은 거룩하고 흠이 없는 백성과 아들들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모든 사람이 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게 하는 구원이 아니고 믿는 자만이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는 구원을 하시기로 정한 것이다(요1:12 -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믿는 자 만이 될 수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는 교회는 어떤 모습인가? 예수님 혼자서 큰 희생을 치르시고 나는 편히 앉아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내 생명도 내어 놓아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하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2:24에서 그리스도께서 한 알의 밀알이 되신다고 하시면서, 25절에서는 우리도 생명을 내어 놓지 않으면 영생할 수 없다고 하셨다.
하나님의 교회는 공짜 심리로 모여든 교인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큰 수고와 희생을 치르셨고, 나도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해서 – 그리스도 안에 소속되어서 – 함께 십자가에 죽고 함께 새 사람으로 부활 – 중생 – 해서 그리스도의 몸에 속하는 것이다. 교회는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자,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들의 공동체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을 모르는 사람은 교회의 가족이 될 수 없다. 그래서 구원의 조건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할 뿐만 아니라 거듭남 – 중생 또는 새로운 창조 – 을 받아 들이는 것까지를 포함 한다. 이렇듯 다시 살아난 사람들 만이 참 하나님의 교회 가족이다.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동참하는 교회를 만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기 위한 교회의 노력은 어떤 것이 있어야 하는가?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려는 교회의 노력에는 원동력 - 교회를 교회답게 만드는 힘 - 이 되는 힘이 있어야 하는데, 그 원동력이 되는 힘은 예배와 선교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교회의 노력을 이끌 힘의 하나가 예배 – 교회를 세상과 구분하는 척도의 하나로서의 예배 - 에서 나온다는데 도대체 예배에서 어떤 힘이 나온다는 것인가?
교회가 늘 드린다고 하거나 본다고 하는 예배는 형식의 면이 강조된 예(禮)와 배(拜)의 집합체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예배는 이보다도 큰 개념의 예배인 것이다.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는 한 순간만 진실해져서 드리는 예배는 아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모든 시간과 공간을 관통하는 예배를 말하는 것이다. 주일의 일정한 시간만 진실해져 예배를 드린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와 떨어진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아니 진리로 예배를 드리는 것은 그럴 수 없다. 주일의 일정 시간 만이 아닌 삶의 모든 시간이 진실해져야 할 것이다. 이렇듯이 성경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예배는 단일 시공간에서의 형식이 강조된 예배보다 다면적이고, 다층적인 시공간에서의 예배인 것이다. 이러한 다면적이고, 다층적인 예배는 그리스도인의 인생 전반을 꿰뚫고 있다. 다음은 정일웅 교수의 기독교예배학개론의 일부분이다.
예배는 한자 말의 예배(禮拜)의 개념에서 우리는 예를 다하여 절한다는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으나, 서구교회와 신학적 이해로는 그런 의미보다는 ‘섬김’과 ‘봉사’의 의미에서 예배의 개념을 더 깊게 이해하고 있으며, 봉사의 직무란 뜻에서 예배 학의 이론이 전개된다고 하겠다.
오늘날 영어권이나 독일어 권에서 공히 인식하고 있는 분 명한 예배의 개념적 이해는 ‘봉사적 개념’을 더욱 중히 여겨 영어의 God’s service 또는 Worship-service란 표현을 쓰기도 한다.
예배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봉사라는 개념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이해 아래서 교회는 ‘모든 일을 하나님께 봉사하듯 한다면 이는 예배이다’라고 예배의 개념을 확장해 이야기 할 수 있다. 예배의 개념 확장 아래서 교회는 세상 사람들과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가치관 아래서 사고하고 행동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예배의 가치관 아래에서 사고하며 행동하기 때문이다. 예배의 새로운 이해로 예배를 통한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참여를 교회의 내적 사회참여라고 정의할 수 있다. 교회의 사회참여의 일부인 내적 사회참여는 이처럼 확장된 예배 개념으로 사회에 참여로서 구원에 대한 감격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하나는 신앙적 내용으로, 복음을 다른 지역에 옮겨 심는 원심적(遠心的)•확장적인 행위를 가리키는데, 사명(使命) 또는 파견(派遣)을 뜻하는 '미션'이라는 말로 표현되며, 또 하나는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전달함으로써 인간을 회개(悔改)시켜 새로운 인간으로 만든다는 내용적•구심적인 뜻으로, 이 경우는 '에반젤리즘(evangelism)'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선교는 하나님께서 믿는 자를 찾으시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교회의 외적 사회참여이다. 외적 사회참여인 선교를 위해 교회는 사회기관과 구별 되어야 한다. 그래야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의지하지 않겠는가? 교회는 의와 진리의 기관이 되어야 한다. 세상이 두려워하고 피해 다니려고 할 만큼 구별되고 빛이 나고 표가 나야 한다. 이론적이고 추상적이지 않고, 현실적이며 구체적으로 새로운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교회 모습은 어떠한가? 기준 없는 사랑으로, 잘못 이해된 예수님의 사랑 흉내로 세상이 두려워하고 피하기는커녕 비아냥의 대상이 되고 있지는 않는가? 과연 교회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잘 알고 체험하고 있는가? 아들을 주셨고, 십자가에서 목숨까지 버리신 그 특이한 사랑을 참으로 이해하고 받아 들이고 있는가? 그래서 그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의 사랑을 바르게 행사하는 교회인가? 단순한 구제나 사회 사업이나 교제에 머물고 있지는 않는가? 하나님의 거룩하고 흠 없는 자녀가 되게 하려는 강한 의지가 없는 사랑은 인간적인 사랑이다. 인간적인 사랑은 인간을 회개시켜 새로운 인간으로 만들 수 없다. 교회는 어떻게 행할 것인가를 주의해야 한다. 사랑은 맹목적인 것이 아니다. 사랑은 상황적이어서 플래쳐(Fletcher)처럼 다분히 인간 중심의 사랑으로 풀어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 중심의 사랑이어야 한다.
하나님 중심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교회는 바른 가치관과 목표를 세워야 한다. 그 가치관과 목표의 핵심은 복음을 통하여 예수님 안에서 세상 사람이 그리스도인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함께 한 몸이 되어 약속을 함께 가지는 자가 되는 에베소서 3장 6절의 말씀을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 중심의 사랑을 그 중심에 품은 선교는 하나님 선교라는 개념으로 확장된다. 다음은 하나님 선교에 대한 2003년 6월 8일 향린교회 김창락 목사의 설교의 일부분이다.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이른바 선교의 주체이심을 명백히 나타냅니다. Missio라는 라틴 낱말은 영어로는 mission인데 missio 또는 mission은 원래 ‘파송’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missio dei 즉 ‘하나님의 파송’이라는 어구는 ‘하나님께서 파송하심’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는 온 세상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구원 사업을 이루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그 아들을 세상에 파송하시고 그 아들은 성령을 파송하셨습니다. 교회는 아들과 성령을 보내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행동의 결과일 따름이며 하나님의 손에 쥐어진 도구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교’라는 표현은 선교가 하나님께 속한 활동이며 하나님 자신의 일이라는 것을 명백히 드러냅니다. 교회는 이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한에서 그 존재 목적에 부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교는 선교 활동의 역점을 교회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옮겨 놓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사업은 개개인의 영혼 구원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의 총체적 구원을 목표로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교의 작용 범위는 자연계까지도 포함한 온 세상의 모든 영역입니다.
선교는 그리스도인이 사회참여의 영역에서 질 수 있는 최대 사명의 하나이다. 선교는 영혼에만 국한되지 않는 인간의 전 인격적인 필요, 즉 영적, 육적, 사회적 필요 등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선교인 것이며, 교회의 외적 사회참여인 것이다.
바울은 교회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기를 간절히 간구하는 기도를 통해 우리에게 믿음의 성장을 요구하고 있다.
아버지께서 그분의 영광의 풍성하심을 따라 그분의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여 주시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마음 속에 머물러 계시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여러분이 사랑 속에 뿌리를 박고 터를 잡아서, 모든 성도와 함께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깨달을 수 있게 되고,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여러분이 충만하여지기를 바랍니다.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와 하나됨은 구원을 이루어가는 과정이다(엡 2:22 -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에베소서 3장에서 바울이 차차 그리스도의 구원을 알게 되어 가길 원하 듯이 교회의 사회참여는 점진적으로 구원을 이루는 – 알게 되는 – 과정인 것이다. 교회는 성숙에 의하여 세워지는 것이라고 하겠다. 바꾸어 말하면 교회의 일원인 그리스도인들이 온전해지는 것을 가리켜 교회가 세워진다고 말할 수 있다. 교회의 성숙은 그리스도인의 성숙에서 나타난다. 교회의 내적, 외적 사회참여가 그리스도인의 내적, 외적 사회참여로 확대되어 이루어진다면 교회는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해질 것이다.(엡 3:19)
또한 바울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맡겨진 각각의 역할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 각각의 역할들이 바르게 수행될 때 교회는 생명력을 얻는다고 말하고 있다. 아울러 이 역할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지켜야 할 명령 – 도덕적 목록으로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하는 문제가 아닌 과제로서의 - 인 것이다. 이 명령이 개개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과거 허물과 죄로 죽었던 상태로부터 나와 선한 일을 하는 하나님의 작품으로 살기를 요구한다(엡 2:1~10).
명령의 완수가 교회의 사회참여로 - 보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참여의 집합체인 - 교회에게 생명을 불어 넣어주어 교회의 생명력으로 작용하는 이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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