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가는 구약성경 서평
역사서 서평 – 죽어가는 구약성경
학번 : T2018178, 이름 : 홍영진
<죽어가는 구약성경>은 ‘구약성경이 죽어가는 언어와 같다’는 언어학적 비유를 통해 구약성경에 대한 오해와 오용, 그리고 더 나아가 구약성경을 무시하는 현대 교회의 모습을 조명한다. 저자 브렌트 A. 스트론(Ph.D. 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 1995)은 이러한 문제들로 인하여 기독교 신앙의 근원까지 위협당하고 있음을 여러 객관적 사례들을 통하여 진단하여 보여주고자 한다. 더 나아가 저자는 자신이 진단한 문제의 해결책을 생각지 않은 처방으로 제시하고 있다.
브렌트 A. 스트론 교수는 1995년 프린스톤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루트거 대학과 애즈베리 신학대학과 애즈베리 신학대학원에서 강의를 했으며, 프린스톤 신학대학원과 콜롬비아 신학대학원에서는 방문교수로 강의를 진행했다. 현재는 캔들러 신학대학원에서 구약을 가르치고 있으며, 고대 근동의 도상학. 사해사본, 이스라엘의 종교 전승, 신명기와 시편, 구약신학 및 주해 등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 중이다. 저서로는 What is Stronger Than a Lion: Leonine Image and Metaphor in the Hebrew Bible and Ancient near East(2005)외 다수가 있다.
역자 방정열 교수는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미국 일리노아 주 디어필드에서 소재한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대학원에서 구약학 석사과정(Th.M)을 수료했고, 동 대학원에서 선지서와 시편연구로 저명한 벤게메렌 교수의 지도하에 “A Linguistic and Literary Analysis of in books Ⅰ-Ⅲ of the Paslter”이란 제목의 논문으로 구약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주로 역사서, 시가서, 소예언서, 구약해석학에 관심을 두고 연구 활동을 지속하고 있는 저자는 현재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겸임교수)과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외래교수)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으며 행복을 전하는 교회의 협동목사로서 섬기고 있다. 저서로는 “새로문 시편 연구:실패한 인간-왕에서 신실하신 하나님-왕을 향하여”(새물결플러스 2018)이 있고, 역서로는 “예언자와 그 메시지”(대서, 2013,공역),“시편으로의 초대”(대서,2014 공역),“발람,참 예언자인가?”(성서유니온,2015),“성경 무오성 논쟁”(새물결플러스,2016),“토라로서의 시편:윤리적 차원에서 시편읽기”(대서,2017),“성경신학적 구약개론: 약속된 복음”(부흥과개혁사,2018,공역)등이 있다.
‘츤데레’라는 말이 있다. 츤데레는 새침하고 퉁명스러운 모습’을 나타내는 일본어 의태어인 츤츤(일본어: つんつん)과 ‘부끄러워하는 것’을 나타내는 일본어 의태어 데레데레(일본어: でれでれ)의 합성어이다. 즉, '츤데레'의 뜻은 처음에는 퉁명스럽고 새침한 모습을 보이지만, 애정을 갖기 시작하면 부끄러워하는 성격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한국어의 ‘새침데기’ 또는 ‘깍쟁이’라는 말과 비슷하지만, 완벽히 일치하지는 않아 ‘츤데레’라는 용어 그대로 사용하는 추세이다.
구약성경은 이러한 ‘츤데레’의 모습을 하고 있기에 그 속마음을 알기 전에는 이상한 율법 이야기, 야만스러운 폭력 이야기, 거기에다 더해 예측 불가의 하나님 이야기로 독자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여기서 구약성경의 오역과 오용, 무시라는 문제가 발생한다. 스트론은 현대 교회가 ‘츤데레’의 모습을 하는 이러한 구약성경을 오해함으로써 생기는 개인적 경건과 공중예배 등에서의 구약성경을 무시하는 행동-오역, 오용 등으로 이어지는- 문제들이 교회에 아무런 유익이 없으며, 더 나아가 구약성경이 죽음의 상황까지 이를 수 있다는 경고를 한다. 저자는 <죽어가는 구약성경>에서 구약성경이 처한 상황의 진단과 해결책을 의학과 언어라는 메타포를 이용하여 설명한다. “구약성경이 아직 죽지는 않았지만, 죽어가고 있다는 나의 분석은 언어학적 비유에 의지한다. 즉 구약성경은 언어 혹은 언어와 매우 흡사하여 다른 언어들처럼 꽤나 빠른 속도로 사멸하여 생명체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이다.”
<죽어가는 구약성경>에서 스트론은 구약성경이 죽어가는 객관적 증거로 2010년 발표된 뷰 포럼(Pew Forum on Religion and Public Life)의 미국의 종교 지식 여론 조사(The U.S. Religious Knowledge Survey) 결과를 제시한다. 종교성이 강한 미국인들이지만 조사 결과에 의하면 미국의 기독교인들이 성경, 특히 구약의 기본적인 사실에 대해서 상당히 무지하다-창세기가 성경의 첫 권이라는 것을 아는 기독교인이 63% 불과하다-는 것을 근거로 제시한다. 이에 더해 교회에서도 구약성경을 기피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설교와 예배에서 구약성경을 무시하는 경향을 객관적 통계자료로 제시하는데 ‘최고의 설교들’이라고 알려진 설교집 가운데에서 구약 사용 빈도를 신약성경과 비교하여 증명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들에 의해서 구약성경은 죽어가고 있다. 구약성경이 죽어가는 모습을 노인들만 사용하다 사라져버리는 언어의 소멸과 비교하며 구약성경이 처한 현재 상황이 심각한 것임을 역설한다.
죽어가는 구약성경이 앓고 있는 병적 징후들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에 대해 세 가지 영역으로 나누어 분석한다. 세 가지 영역은 도킨스를 필두로 하는 새로운 무신론자 그룹과 말시온주의자들, 그리고 조엘 오스틴으로 대변되는 새로운 플라스틱 복음들이다.
첫째 문제는 구약성경을 평면적이고, 문자적인 독해로 읽어낸다는 것이다. 도킨스가 바로 이런 부류이다. 스트론은 도킨스의 성경 사용에 문제가 있음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예로든 창세기 19장의 사건에서 구약성경은 롯을 전혀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또 창세기 22장에서는 인신제사가 초점이 아닌 아브라함의 시험이 초점이라는 것이다. 도킨스처럼 구약성경을 종합적 지식 없이 읽을 때 우리는 오해에 빠질 수 있으며 구약성경을 사지로 내 몰수 있다.
둘째 문제는 고대와 현대의 말시온주의자들이다. 말시온주의는 구약의 하나님 묘사가 신약의 하나님 묘사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던 2세기 이단이다. 말시온은 결국 구약성경의 하나님을 유대인의 하나님으로 정의하며 구약의 하나님은 성마르고, 변덕스러우며, 무지하고, 폭군적이며 잔인하다고 평가하며 구약성경을 배격한다. 현대에 이르러서 아돌프 폰 하르낙(Adolf von Harnack, 1851~1930)이나 프리드리히 델리취(Friedrich Delitzsch, 1850-1922) 등이 반유대주의의 발흥에 이바지하며 독일교회의 구약 무시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행하신 일에 대한 이해의 결핍에 얼마만 한 영향력을 미쳤는지 자세히 설명한다.
셋째 문제는 새로운 플라스틱 복음으로 불리는 행복론자들, 조엘 오스틴으로 대변되는 번영신학의 문제이다. 이들의 설교가 대중의 인기를 누리고 있으므로 더 큰 악영향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플라스틱 복음으로 불리는 행복론자들의 메시지의 문제는 맥락을 무시한 무분별한 본문 사용이다. 조엘 오스틴의 경우 자신의 추상적인 규칙, “당신이 입 밖으로 말할 때 비로소 자신의 믿음에 생명을 불어 넣는다.”라는 규칙에 대한 뒷받침 증거로 구절 일부를 취하는 식이다. 행복론자들은 특정 구절을 임의대로 사용하여 인간은 행복을 누릴 권리가 있다고 호도한다. 이러한 이들의 메시지는 욥의 고난과 같은 삶의 어려움을 당한 사람에게 욥의 친구들과 같이 힘이 되기보다는 짐이 되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스트론은 이러한 위기상황에 빠진 구약성경을 살리기 위해서 치료와 회복의 길을 제시한다. 죽어가는 구약성경을 살리는 길은 구약의 언어인 히브리어를 새롭게 이해하고, 학습하여 제2의 언어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델로서 신명기에 집중한다. 신명기에는 반복과 연습, 실천과 노래가 있다. 이러한 신명기는 죽어가는 구약성경을 살리는 좋은 처방이라는 것이다. 신명기는 반복을 통한 효과적인 학습에 유익하며 더 나아가 신명기의 삶을 살아낸 여호수아의 삶이 성공적이었다는 것이다. 신명기 신앙을 회복할 때 구약성경의 회복 또한 이루어진다. 이를 위해서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구약성경을 지속적으로, 의도적으로 사용하라는 것이다. 스트론은 쉽지 않은 길이지만 마지막에는 성경이라는 언어를 배우고 연습하여 문장을 읽고, 담화를 만들며, 꿈을 꾸는 미래를 예언하며 글을 마친다.
책 내용은 다분히 미국적이라 느껴졌다. 그러나 점점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 아래 들어가고 있는 한국교회에도 그 통찰이 유익하다고 생각되었다. 말랑말랑한 미국 기독교인들의 현세지향적인 번영신앙의 틀 안에서 구약성경은 그리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 구약성경의 여러 메시지들은 당장의 필요를 채우기에는 그 깊이가 너무 깊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로는 복음적인 교훈을 담고 있어 바로 사용 가능한 신약성경이 실용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반해 구약성경은 삶의 적용에 이르기 위해 믿음의 용기가 필요하다는 리스크를 안고 있기에 전반적인 이용에 한계를 느끼는 것은 아닐까 나름 평가해 본다.
<죽어가는 구약성경>을 읽는 내내 현상학의 대표적 철학자인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의 조교로 출발한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가 생각났다. 하이데거는 “인간은 예술과 시 속에 존재의 집을 마련해야 한다. 언어는 곧 존재의 집이다.”라고 주장했다. 나의 존재는 상대에게 눈에 보이는 대상이며 사회적 실천으로 드러나는 존재지만, 언어로 보여주는 내가 더 명료하게 보인다는 의미이다. 구약성경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현대 기독교는 초기 기독교보다 겉으로는 세련되어지고 접근성은 높아졌을지 몰라도 존재의 무게감은 많이 가벼워졌다고 생각된다. 또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국교회에게 주는 조언을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초기 한국교회는 한국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초기 한국교회와 같이 보다 무게감 있고, 영향력 있는 오늘의 기독교가 되기 위해서 구약성경의 언어를 사용했으면 좋겠다. 교회와 성도들의 삶 가운데 구약성경의 언어의 집이 지어져 존재감이 있는 한국교회로 거듭났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파블로 루이즈 피카소(Pablo Ruiz Picasso, 1881~ 1973)의 그림이 왜 그렇게 비싼 가치가 있는지 아는가? 구도도, 색감도 정돈되지 않은 피카소의 그림은 엉망으로 그린 낙서와 같이 보인다. 그러나 피카소의 삶과 그의 미술 세계를 알고 난 이후 후기 피카소의 그림에 담긴 의미는 보는 이에게 크게 다가오며, 그 가치를 가늠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프랑스 작가 마르쉘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는 말했다. “진정한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가지는 데 있다.” <죽어가는 구약성경>은 항상 옆에 있어 그 가치를 깨닫지 못했고, 더 나아가 함부로 대했던 구약성경에 대한 새로운 눈을 열어 주었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 구약성경을 다시 열어보니 츤데레와 같이 묵묵히 옆에 서 계셨던 하나님의 사랑을 마치 엉망으로 그려진 피카소 그림의 가치를 깨닫게 된 사람처럼, 새로 취업하여 자식을 위해 묵묵히 일하신 아버지의 무뚝뚝한 사랑을 알고 난 아들처럼 진하게 느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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